850m 높이의 피조바딜레 북동벽
붉은 선이 초등 루트
피츠 바딜레 북동벽 등정 후 산장에 도착한 캐신·에스포지토·라티.
- 알프스의 대표적 명봉 피츠 바딜레 등반사 -
리카르도 캐신의 피츠 바딜레 북동벽 초등과 비극
스위스의 본다스카 계곡과 이탈리아의 마지노 계곡 사이의 화강암 암릉에는 피츠 첸갈로(3,367m), 피츠 바딜레(3308m), 피츠 제멜리, 에귀 스치오라 등 수십 개의 봉우리가 일대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프랑스 산악인 가스통 레뷰파가 그의 명저 <별빛과 폭풍설>에서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권곡(圈谷·Cwm)은 암봉들이 원형극장처럼 둘러서 있는 스위스의 본다스카 계곡이라고 말한 바 있고, 이탈리아 산악인 월터 보나티도 그의 명저 <나의 산>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경은 엔가딘 계곡과 인접한 스위스의 국경선상에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산군의 산악미에 대한 찬사다. 이 산군을 화폭에 담으려고 유명 풍경화가들이 경쟁적으로 이곳에 몰려들었고, 또한 이 산군을 예찬하는 글을 쓰다가 시인이 된 산악인들이 부지기수다.
- ▲ (좌)피츠 바딜레 북동벽 등정 후 산장에 도착한 캐신·에스포지토·라티. (우)암벽등반 중인 캐신
북벽 초등 노린 산악인들의 조우
이 산군에서 가장 유명한 산은 삽을 거꾸로 세워 놓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이탈리아어로 삽이란 뜻의 ‘바딜레’란 이름을 얻게 된 봉우리로, 1867년 영국 산악인 쿨리지가 남벽으로 초등했다. 이 산의 북동벽과 북서벽 사이를 지나는 칼날 능선인 북릉은 1923년 스위스 산악인 리시와 그의 동료가 초등했다.
이 산의 거대한 북동벽은 높이가 약 850m인데, 아래쪽의 매우 가파른 *슬랩 지대와 중앙의 검은 *쿨와르 지대, 그리고 상단부에 대각선 방향으로 형성되어 조각 작품을 연상시키는 여러 개의 병렬 침니 구간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프스의 여느 북벽과 마찬가지로 이 북동벽은 빈발하는 악천후와 악명 높은 낙석으로 인해 오랫동안 아이거 북벽·그랑조라스 북벽 등과 함께 알프스의 마지막 등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 벽은 초등자 캐신을 위시해서 가스통 레뷰파·월터 보나티·리오넬 테레이·루이 라쉬날·헤르만 불 등 기라성 같은 유명 클라이머들이 그들의 등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1937년 이탈리아 레코 출신의 세 청년 리카르도 캐신·기노 에스포지토·비토리오 라티는 피츠 바딜레 북동벽을 초등하려고 스치오라 산장에 당도했다. 그들이 피츠 바딜레의 북릉을 200m 오르면서 북동벽의 루트를 정찰하고, 그 벽 밑에 섰을 때 검은 비구름이 몰려와 등반을 접어야 했다. 여러 날 기상상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세 사람이 등반을 포기하고 레코로 돌아가려고 산장 문을 막 나설 때 코모 출신의 클라이머 마리오 몰테니와 주세프 발세치가 도착했다. 그들도 피츠 바딜레의 북동벽을 초등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두 팀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내심 경쟁심에 불타고 있었다. 캐신 일행이 그들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 몰테니는 자신이 시도했던 등반 루트와 *비박 지점, 도달했던 최고 지점, 그리고 전년도 자신의 추락 지점 등에 대해 상세하게 얘기해주었다. 캐신 일행은 몰테니가 그 벽에서 추락한 후에 다시 시도하다가 4일간 구사일생의 탈출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캐신 일행은 자신들이 이용료를 지불한 산장의 열쇠를 코모 클라이머들에게 빌려 주겠노라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호의를 거절하고 비용절감을 위해 산장 부엌 마루에서 지내겠다고 말했다.
- ▲ 흰 구름을 인 채 아름다운 풍광으로 솟아오른 피츠 바딜레.
레코로 돌아온 캐신 일행은 다시 휴가를 얻게 될 때까지 10여 일 동안 코모 출신 클라이머들이 피츠 바딜레 북동벽의 어느 지점까지 진출했는지 몹시 궁금했다. 또한 그 벽의 초등을 코모 팀에게 영영 빼앗기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캐신 일행이 피츠 바딜레의 역사적인 초등을 구경하려는 4명의 친구를 더 데리고 스치오라 산장에 다시 등장했을 때, 코모 팀은 계속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산장에 버티고 있었다.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캐신 일행은 피츠 바딜레 북동벽을 다시 정찰하기 위해 북릉을 600m 오르고 산장으로 돌아오는 도중 빙하에서 눈사태로 죽은 영양 세 마리를 발견했다. 캐신은 영양의 고기 맛이 일품이라며 그 영양들을 운반하자고 제안했고, 친구들은 그렇게 했다가는 등반대를 이탈하겠노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결국 캐신에게 설득되어 그 영양을 요리해서 모두 포식했다.
7월 14일, 날씨가 호전되자 코모 팀은 아침 5시에 산장을 출발했고 캐신 일행은 3시간 뒤에 출발했다. 코모 팀의 출발 지점은 캐신 일행의 출발 지점보다 우측으로 100m 떨어진 지점이었다. 캐신이 선등하고, 에스포지토가 중간에서 확보를, 그리고 라티가 후위를 맡았다. 그들은 *베르그슈른트를 건너 우측 대각선 방향으로 100m 길이의 *레지를 돌파, 한 시간 뒤 코모 팀을 앞질렀다. 캐신 일행은 이어 커다란 *버트레스에 오르고 *디에드르로 슬랩을 돌파한 다음 좌측 대각선 방향 *크랙에 올랐다. 그러자 우측 *오버행 암벽을 끼고 가파르게 거꾸로 경사진 디에드르 여러 개가 4, 5피치 정도 연이어 나타났다.
그들은 디에드르 위쪽의 편안한 레지에 도달해서 첫 번째 비박을 준비했다. 얼마 후에 코모 팀도 레지에 도달해 캐신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비박을 준비했다. 캐신 일행은 밤 10시에 산장에 머물고 있던 친구들에게서 우리나라의 옛날 봉화처럼 안부를 묻는 불빛 신호를 받고 무사하다는 불빛 답신을 보냈다. 클라이머들이 오늘날처럼 무전기나 휴대용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시절의 진풍경이다.
다음날 아침 5시에 캐신 일행이 등반을 재개하려 할 때 코모 클라이머 몰테니가 캐신에게 두 팀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캐신은 가파른 암벽에서 5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함께 등반하는 것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망설였지만, 결국 인정상 거절할 수 없어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캐신이 그 제안을 수용한 이유가 ‘인정 때문’이라고 말했으나 사실 내심으로는 등정 성공을 위해 그곳 지리에 밝은 코모 팀의 경험을 십분 활용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캐신 같은 용의주도한 클라이머가 가파른 거벽 등반에서는 빠른 등반 속도가 대원들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결단을 내렸을 리 없다. 캐신은 자신이 베푼 이 호의가 엄청난 비극를 낳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코모 클라이머들 낙석에 배낭 찢기면서 식량 분실
- ▲ 피츠 바딜레 등반 루트.
캐신은 발세치를 네 번째로 배치하고, 경험 많은 몰테니에게 후미를 맡겼다. 5명이 함께 등반하는 일이 처음에는 거추장스러웠지만 그들은 그런 대로 흡족할 만한 속도를 유지했다. 그들은 등반이 수월한 구간을 올라 작은 눈밭에 도달했다. 왼쪽의 낙석 통로인 중앙 쿨와르가 유일한 통로였다. 그들은 쿨와르 속의 난코스를 수직으로 두 피치 오른 후, 낙석의 위험을 감수하며 수평 레지를 따라 우측의 큰 오버행 아래까지 먼 구간을 트래버스해야 했다. 캐신은 그 레지의 트래버스를 무사히 마치고 오버행 밑에까지 올라갔다.
그가 오버행 언저리에 어렵사리 *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자일을 통과시키려는 찰나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때 에스포지토는 캐신보다 20m 아래쪽 지점에서 캐신을 확보하고 있었고, 라티는 에스포지토와 거의 같은 고도에서 레지의 중간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발세치는 트래버스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고 후위를 맡은 몰테니는 발세치보다 15m 아래쪽의 침니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커다란 폭발음에 이어 대포알이 날아가는것 같은 “쉿~” 소리와 함께 고막을 찢을 듯 “우당탕 쾅쾅” 하는 굉음이 연발했다.
캐신이 위쪽을 보니 북릉에서 굴러떨어진 커다란 둥근 바윗돌이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캐신은 에스포지토에게 자일을 당기라고 소리치고 번개처럼 빠른 동작으로 오버행 밑으로 몸을 숨겼다. 바로 그 순간 그 거대한 바윗돌은 캐신이 몸을 숨긴 오버행 위를 강타하며 박살이 나서 수천 개의 바위 파편이 되어 레지 위로 돌사태를 쏟아부었다.
몇 분 동안 먼지구름에 가려 클라이머들은 서로의 안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동안 코를 찌르는 시큼한 유황 냄새가 공중에 맴돌았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 엄청난 돌사태의 폭격 속에서 단 한 사람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유일한 피해는 큰 돌조각 하나가 후등자 몰테니가 짊어지고 있던 배낭의 뒤쪽을 찢어 버리는 바람에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식량 및 내용물이 몽땅 절벽 아래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그 사건을 겪고 나서 한동안 공포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이 참으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대단한 용기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즉석에서 등반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포감이 가라앉자 강심장의 소유자인 캐신은 다시 오버행 돌파를 시도했다. 그가 전에 피톤을 설치했던 장소가 바윗돌에 맞아 박살이 난 것을 보고, 그는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며 전율했다. 그는 어렵사리 오버행을 넘고 작은 쿨와르에 오른 후 대각선 방향으로 20m쯤 트래버스한 다음 수직 방향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그러나 저녁 때쯤 코모 팀 두 사람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등반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들은 당장 두 군데의 난코스를 기필코 돌파해야 했기 때문에 휴식의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이제 캐신 일행도 극도의 피로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둡기 전에 마땅한 비박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등반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캐신은 좌측으로 낙석의 위험이 있는 레지를 따라 트래버스한 다음 쿨와르에 도달했다. 그가 쿨와르를 돌파한 후 긴 *스퍼에 올랐을 때 브레가를리아 계곡에서 아름다운 운해가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와 풍광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캐신 등반대는 좌측으로 30m를 더 오르고 커다란 슬랩 아래의 레지에 당도, 동벽에서의 두 번째 비박을 맞았다. 코모 출신 클라이머들의 탈진 증세 때문에 그들이 이 벽 등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몹시 염려되었다. 도대체 그들은 언제 이 거대한 암벽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떤 난관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고난이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을까?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나에겐 잠들기 전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먼 길이 있다’고 노래했듯이 그들 앞에는 돌파해야 할 절벽 길이 아직도 멀었다.
캐신 일행은 코모 출신 클라이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무척 애를 썼다. 코모 팀은 몇 시간 전 낙석에 배낭이 찢겨 모든 식량을 분실했기 때문에 캐신 일행은 넉넉하지 못한 자신들의 식량, 말 그대로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었다.
친구의 죽음 눈치채자마자 주저앉더니 못 일어나
- ▲ 위압적인 모습의 피츠 바딜레 북동벽.
시간이 조금 지나자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그들을 덮쳤다.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 같은 굉음이 좌우 골짜기들과 암벽들로 메아리쳤고, 암흑 속에서 불꽃놀이처럼 3분 간격으로 번쩍이는 번갯불 쇼는 그들의 공포감을 최대한으로 고조시켰다. 뿐만 아니라 억수같이 퍼붓는 물폭탄이 폭포를 이루어 위쪽 쿨와르로 쏟아져내렸다. 그들이 앉아 있던 레지는 너무 비좁아서 몸을 딴 데로 피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앉은 채로 빗물 폭포수를 뒤집어쓰고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고 말았다.
자정에 강한 북풍이 불어와 비구름을 몰아내자 하늘에 다시 별이 빛났지만 추위는 한층 더 기승을 부렸고, 그들이 입고 있던 젖은 옷은 강풍에 얼어 버려 얼음 갑옷으로 둔갑했다. 당시의 등산복은 오늘날과 같은 첨단 소재와는 천양지차였다. 가장 따뜻한 복장으로 스웨터 정도가 고작인데 그것마저 빗물에 젖었고, 강풍마저 몰아쳤으니 그들은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떨며 강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잊기 위해 합창을 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아침이 되어 태양이 떠오르자 추위가 한결 누그러져 등반을 재개했다. 코모 출신 클라이머들은 간밤의 모진 시련을 겪고 나서 동작이 더욱 굼떠졌다. 그리하여 아주 느린 속도로 등반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캐신은 몹시 지친 코모 클라이머들을 에스포지토 뒤에 배치하고 라티에게 후미를 맡겼다.
그들은 유일한 통로, 즉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침니를 여러 피치 오르고, 좌측 슬랩을 돌파해 커다란 쿨와르 밑에 도달했다. 그 쿨와르에는 여러 개의 오버행이 있어 낙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검은 비구름이 다시 몰려와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등반을 재개한 지 두 시간 만에 코모 친구들은 탈진이 더욱 심해졌다. 캐신 일행은 자신들도 몹시 지친 상태였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코모 팀의 등반을 도우며 그들을 격려했다.
정오에 다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낙석 위험이 크고 매우 가파른 슬랩지대를 트래버스하고 나서 유일한 등로인 중앙 쿨와르로 들어서서 계속 찬물 세례를 받으며 등반했다. 그들은 강물의 가파른 구간을 거슬러 오르는 송어나 연어 떼와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비가 우박으로 변해 그들의 얼굴과 손을 사정없이 강타했고, 찬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빗물에 젖은 팔다리가 마비될 지경으로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갑자기 우박이 멈추더니 폭설이 퍼붓기 시작해 암벽이 눈으로 뒤덮였다. 그런 상황에서 암벽에서의 비박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정상에 올라선 다음 노멀 루트로 하산해야 했다. 하지만 코모 팀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때까지 지친 몸으로 암벽에서 사투를 벌여온 그들은 맹위를 떨치는 폭풍 앞에서 백기를 들어야 할 판이었다. 캐신 일행은 원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그들에게 억지로 비스킷을 먹이고 비상용 코냑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정상을 향해 등반을 계속했다.
마침내 중앙 쿨와르를 벗어나자 등반이 훨씬 쉬워졌지만 몰테니와 발세치의 동작이 너무 더뎌 거북이 걸음을 면할 수 없었다. 눈이 계속 내려 가시거리가 1m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직감으로 정상 가까운 지점에 도달했다고 느꼈고, 일단 정상에 도달하기만 하면 하산이 수월한 노멀 루트가 있기 때문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낙관했다.
- ▲ 크랙 구간을 등반하는 캐신.
오후 4시경, 그들은 드디어 동벽을 돌파했다. 그러나 폭풍과의 사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상에서는 폭풍이 더욱 사납게 기승을 부려 강풍에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없었고,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으며, 가시거리가 제로인 상태에서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다. 사방에서 번갯불마저 번쩍거리며 낙뢰의 위험을 예고했다. 얼음 갑옷으로 둔갑한 그들의 옷에 흰 눈이 엉겨 얼어붙어, 그들은 움직이는 눈사람 꼴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그들은 하산로를 찾아냈다. 그런데 중간쯤 내려와서 그들은 길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시달릴 때 캐신 일행보다 그 지역의 지리에 더 밝은 코모 팀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이제 코모 팀의 두 사람은 생명의 위기를 맞았다고 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하산로를 찾아내며 달팽이 걸음을 계속했다. 야수 같은 폭풍은 더욱 더 맹위를 떨치며 그들 중 가장 약한 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라티가 발세치를 데리고 앞장섰고, 캐신과 에스포지토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몰테니와 동행했다.
캐신과 에스포지토는 몰테니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쫓아내려고 온갖 수단을 총동원했다. 그들은 강제로 몰테니의 입 속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코냑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캐신이 몰테니를 부축했지만 몰테니는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는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신음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눈바닥에 주저앉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캐신과 에스포지토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인정에 치우쳐 생각하면 몰테니의 시신을 운반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나,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런 악천후 속에서 지친 몸으로 시신을 운반한다는 것은 불행을 확대할 수 있는 우행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감정이 이성을 압도했다. 캐신은 몰테니의 시신을 어깨에 둘러메고 하산을 강행했는데 정말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했다. 얼마쯤 산을 내려와 캐신은 에스포지토의 충고에 따라 둥근 바위 옆, 폭풍을 가릴 수 있는 장소에 몰테니의 시신을 안치했다.
캐신과 에스포지토는 몰테니의 비극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라티와 발세치를 따라잡았다. 캐신은 발세치에게 그의 친구 몰테니의 비극에 대해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발세치도 지금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상태인데 친구의 죽음이 그의 삶의 의욕과 투지를 약화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발세치가 자신의 친구 몰테니를 찾다가 친구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자 비극이 발생한 것을 직감한 듯 바위 옆에 서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더니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들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그는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의 품에 안겨 영면했다.
캐신 일행은 두 번째 비극을 겪고 나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은 발세치의 시신을 안전한 장소에 안치해 두고,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운행이 불가능해 세 번째 비박을 했다. 두 동료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은 이제 남은 세 사람 중 다음 비극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 생각하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2시간 지속되던 폭풍이 자정에 멎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산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북동벽에서 52시간을 보냈고, 등반에 소요된 시간만 34시간이었다. 그리고 벽에서 12시간 동안 폭풍에 시달렸다. 그들은 다음날 구조대와 함께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피츠 바딜레 북동벽 초등이라는 그들의 위업은 이렇게 두 사람이 목숨을 잃은 비극으로 빛이 바랬다.
다음해인 1938년 캐신은 에스포지토 등과 아이거 북벽을 초등하려다가 헤크마이어 일행이 그 벽을 이미 초등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랑조라스 북벽의 워커스퍼로 발길을 돌려, 어려운 루트를 초등하는 데 성공했다.
1945년 프랑스의 산악인 가스통 레뷰파는 그랑조라스 워커스퍼의 캐신 루트를 등정하고 나서 피츠 바딜레 북동벽의 캐신 루트를 재등할 결심을 했다. 3년 뒤인 1948년 레뷰파는 피에르를 대동하고 피츠 바딜레 북동벽으로 향했다. 그 벽이 초등된 지 11년 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피츠 바딜레의 벽 밑에서 벽에 걸어놓은 그림 액자처럼 암벽에 설치된 피톤에 매달려 추위에 떨며 긴긴 밤을 보냈다. 가스통 레뷰파는 중앙 쿨와르를 루트로 삼고 싶었는데, 햇볕이 북동벽 상부에 닿자마자 낙석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쿨와르 안에 엄청난 양의 고드름이 매달려 있고, 눈 녹은 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단념해야 했다.
- 1952년 독일 산악인 헤르만 불이 4시간 반 만에 완등
- ▲ (위)언더크랙으로 진입하는 캐신. (아래)쿨와르를 등반하는 캐신.
그는 피에르와 여러 시간 수직 디에드르에 오르고 크랙으로 슬랩을 돌파해 오버행 밑에 도달했다. 이어 긴 디에드르에 올라 초등대의 두 번째 비박지인 작은 레지에 도달했다. 그들이 크랙으로 큰 슬랩을 돌파하는 중에 위쪽 설원에서 눈 녹은 물이 크랙으로 흘러내렸다. 또한 검은 구름이 몰려들며 기상이 악화될 조짐을 보였다. 폭우가 쏟아지면 크랙이 격류의 통로로 변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빠른 속도로 등반을 진행했다.
얼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레뷰파가 홀드를 잡자 차가운 빗물이 그의 팔을 타고 흘러내려 어깨 부근을 적셨다. 그들은 위험한 레지에 도달했을 때 초등대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폭풍을 만나 암벽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온몸이 젖었다. 그들은 쿨와르를 따라 북릉으로 계속 치닫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악천후 속에서 끝까지 북동벽 루트를 고수했던 초등대를 생각하며 참았다. 비박 중에 그들의 좌우에서 천둥번개가 연발했다. 그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싸웠다.
잠시 천둥번개가 그친 사이에 이웃 봉우리 첸갈로 벽에서 발생하는 요란한 돌사태 소리의 메아리에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계속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했다. 드디어 6시간 동안 계속되던 악몽이 끝났다. 그들은 등반을 재개해 수평 트래버스로 벽 중앙의 쿨와르 속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쿨와르 속의 *아레트를 돌파하고 등반을 계속해 정오에 등정했다.
1949년 19세의 이탈리아 클라이머 월터 보나티가 동료 바르자기와 피츠 바딜레의 북동벽 밑에서 디에드르를 등반 중 벽 중간 지점에서 여러 개의 둥근 돌들이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굴러떨어졌다. 보나티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위쪽을 쳐다보니 가까이 다가오는 바위들의 크기가 순간순간 커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천운에 맡기고 눈을 꼭 감고 절벽에 납작 엎드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폭발음이 그쳤을 때 그가 눈을 떠 보니 벽 사방은 흰 낙석 자국 투성이였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두 사람은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등반을 재개해 등로가 막히면 펜듈럼으로 새로운 크랙에 붙었다. 그들은 낙빙과 낙석을 피하며 90여m의 북동벽을 오르고 오버행 밑 *테라스에 도달해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은 두 피치를 오르고 선등대가 설치한 피톤을 발견했다. 그들은 크랙을 따라 지그재그로 난이도 V급의 슬랩을 올랐다. 그들은 벽 중앙 스텝 지대로 올랐는데, 습기를 머금은 이끼 때문에 매우 미끄러운 암벽지대를 통과하고 선등대의 두 번째 피톤을 발견했다. 그들은 *초크스톤이 들어찬 좁은 침니를 돌파하고 펜듈럼으로 리지에 붙어 등반을 계속하다가 오버행으로 루트가 막히자 우측의 슬랩에 올라 우박과 폭우를 맞으며 정상에 올랐다.
보나티는 다음해 동료 살라와 피츠 바딜레의 이웃 봉우리인 첸갈로 북서 스퍼를 등반했고, 또한 동료들과 같은 산군의 푼타 산타 안나의 노스 스퍼를 초등했다.
- ▲ 오버행 벽에 매달려 루트를 살피는 캐신.
그들은 초등대가 하루 종일 걸린 구간을 2시간 반 만에 돌파하고 초등대의 첫 번째 비박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비박할 예정이었으나 라쉬날이 쉬지 않고 다람쥐처럼 전진을 계속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피톤 사용을 억제했고, 첫 번째 오버행 돌파에만 인공등반법을 구사했다. 30분 후 그들은 테라스에 도달했다. 그들이 일련의 침니를 오르고, 벽 상부에서 트래버스해 정상 아래의 벽에 도달, 등반을 시작한 지 7시간 반 만에 등정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폭풍이었다.
1951년 악명 높은 악천후 기간 중에 피츠 바딜레 능선에서 대규모의 돌사태가 발생해 피츠 바딜레 북동벽을 휩쓸면서 북동벽의 형태 자체를 크게 변모시켰다. 이듬해 1952년 가난한 독일 산악인 헤르만 불은 자전거를 이용해 스위스의 본다스카 계곡 입구에 도착, 치오라 산장까지 하이킹했다.
다음날 아침 6시 그는 피츠 바딜레의 북동벽을 단독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파른 슬랩을 침니와 디에드르를 이용해 돌파하고 오버행을 넘었다. 벽 사방에 선명한 낙석 자국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그는 다시 크랙으로 전진을 계속했는데 두께 50cm, 너비 20m짜리 빙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여기를 우회해 아레트를 거쳐 최대 난코스의 하나인 6급 디에드르를 돌파하고, 다시 커다란 오버행을 우회했다. 그는 슬레이트 지붕을 여러 장 포개 놓은 듯한 위험한 슬랩 구간을 크랙으로 돌파할 때 녹슨 피톤을 발견했다. 그는 여러 군데의 난구간을 돌파하고 오전 8시에 북동벽 중앙의 설원에 도달해 휴식을 취했다. 그는 설원 좌측의 거대한 디에드르를 대부분 프리클라이밍으로 올랐는데, 두서너 군데에서 선등대가 설치한 피톤을 핸드홀드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가 40m쯤 전진하니 오버행으로 루트가 막혔다. 그는 프랑스제 피톤과 카라비너를 발견했다. 그는 오버행 가장자리에 어렵사리 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슬링을 걸었다. 그는 그것을 밟고 오버행 위쪽에 피톤을 설치한 다음 자일을 걸고 하강해 아래쪽 피톤을 회수한 후 자일을 이용, 다시 오버행에 올랐다. 그는 루프 아래에 도달해 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의지하며 우측의 가파른 슬랩 아래쪽으로 *텐션 트래버스해 두 개의 디에드르 밑에 도달했다.
그는 여러 개의 오버행과 *립을 돌파하고 바위날개 옆을 지나 큰 *루프 아래에 도달했다. 그는 좌측으로 평행 크랙을 따라 트래버스해 중앙 쿨와르 안으로 들어섰다. 최초의 10m는 난코스였다. 그는 작은 홀드를 이용해 여기를 돌파했다. 때때로 바위에 부딪치는 불길한 낙석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걸리 바닥으로 눈 녹은 물이 내를 이루며 흘러내려, 그는 그 물로 갈증을 달랬다.
초등대의 두 번째 비박지가 바라보였다. 그는 여러 개의 크랙과 침니로 전진하고 좌측으로 트래버스해 두 피치 자일 하강으로 다시 커다란 *걸리 안으로 들어섰다. 걸리 안의 눈과 얼음을 피해 *아레트에 올라 10시30분 정상을 밟았다. 등반을 시작한 지 4시간 반 만의 쾌거였다. 그는 정상에서 이탈리아 클라이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중에 독일 산악인 노트루프트는 3시간 반 만에 피츠 바딜레의 북동벽을 등정했는데, 그는 후에 아이거 북벽 등반 중 사망했다.
‘화강암벽의 꿈’은 지속될 것이다
피츠 바딜레 북동벽은 겨울에 적설량이 많아서 벽의 여러 군데가 빙벽과 오버행 얼음으로 뒤덮인다. 1961년 프랑스의 유명 산악인 피에르 마조와 두 친구가 동계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67년 말 스위스 클라이머 다르벨라이 일행과 이탈리아 산악인 고그나 일행 6명이 합동 동계등반을 시도, 열 번 비박하면서 계속되는 폭설과 영하 30℃의 강추위에 맞서 고정 자일과 설동을 설치했다. 1월 2일 정오 그들은 드디어 동계초등에 성공했다.
1976년 영국 및 이탈리아의 젊은 클라이머들이 프리클라이밍 등반법을 구사하며 피츠 바딜레의 북서벽에 워터드롭 필라(Waterdrop Pillar)와 비아 키아라 루트를 개척했다.
1978년 체코의 이고르 콜러와 스탄다 실한, 두 사람은 피츠 바딜레의 북동벽에 두 개의 신루트 ‘비아 데이 피오리’와 ‘비아 델라 리에아 비앙카’를 개척했다. 1980년 체코의 리비츠카는 두 명의 동료와 피츠 바딜레 북동벽에 직벽 루트인 ‘비아 메멘토 모리’를 개척했고, 베너스는 동료와 피츠 바딜레 북서벽에 ‘그랑 디에드르’ 루트를 개척했다. 1982년 체코의 여성 클라이머 호프마노바와 스텔리코바는 피츠 바딜레 동벽의 ‘비아 데글리 잉글레시’ 루트를 동계초등했다.
1986년 이탈리아 클라이머 비탈리는 동료와 피츠 바딜레 북동벽에 3개 루트, 북서벽에 1개 루트를 개척했다. 1987년 피츠 바딜레 동벽에 2개 루트가 개척되었다. 1988년 이탈리아 클라이머 비탈리는 피츠 바딜레 북동벽에 또 하나의 루트를 추가했다. 1989년 피츠 바딜레의 북서벽에 두 개의 루트가 더 개척되었다.
지금까지 피츠 바딜레에는 여러 종류의 루트, 즉 암벽 루트, 리지 루트, 버트레스 루트 등 수많은 루트가 개척되었다. 앞으로도 이 산에서의 루트 개척, 즉 ‘화강암벽의 꿈’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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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이드라마] 리카르도 캐신의 피츠 바딜레 북동벽 초등과 비극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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