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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묘향산 향로봉 행(妙香山 香爐峯 行) -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by 청아 김종만 2009. 4. 8.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님의 <설악행각(雪嶽行脚)> 원문을 찾던 중 선생님의 또 다른 산행기를 발견하였다.

 

신동아 1933년 7월호 p.96~98 에 수록되어 있는 국한문혼용의 글을 이곳에 옮기면서 한글은 원문을 그대로 하고 한자는 한글(한자)로 괄호 안에 넣었다.

 

신동아(新東亞) 1933년 7월호엔 <조선(朝鮮)의 오대(五大) 명산(名山) 최고봉(最高峰) 등척기(登陟記)>로 "장엄(莊嚴)한 천지(天池)가에서"(안재홍(安在鴻)),

“묘향산 향로봉행”(이은상), “한라산 꼭댁이를 향하야”(이병기(李秉岐)), “금강산 비로봉을 항하야”(이광수(李光洙)),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의 위용

(偉容)”(석전사문(石顚沙門))이 수록되어 있다.

 

▼ 신동아 1933년 7월호에 <오대명산 등척기> 페이지마다 수록된 삽화

 

▼ 동국여지도 평안도 부분...오른쪽 위쪽의 희천 아래 묘향이라 표기하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 1872년 지방도의 영변부 지도에서... 윗부분 묘향산에 보현사, 안심대, 상원암, 내원암과 법왕봉, 향로봉, 비로봉, 칠성봉이 표기되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신동아(新東亞) 1933년 7월호 - 최고봉등척기(2)

 

묘향산(妙香山) 향로봉(香爐峯) 행(行)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6월 9일 청후우(晴後雨). 금강굴(金剛窟) 발(發), 보연대(寶蓮臺), 삼성암(三聖菴), 향로봉(香爐峯), 천태동(天台洞), 중비로암(中毘盧庵),

금일(今日) 행정(行程) 70리.

금강굴에서 하룻밤을 드샌 우리는 방주도산(方主道山) 화상(和尙)에게 감사한 인사를 드리고 향로봉으로 향하엿읍니다. (중략)

 

동일(東日) 화상을 앞세우고 수성(首成), 대은(大隱) 두 화상과 나 - 우리 일행은 내원(內院)의 사리각(舍利閣) 무너진 끝을 돌아 동(東)

으로 왼쪽 풀길을 헤치고 큰 바위 밑을 지나 끝없는 길을 올라갑니다. 아무리 산길이라 한들 이러케 적막(寂寞)하고 이러케 험난(險難)

할 수가 잇겟읍니까. 그러나 이런 길이라도 기도객(祈禱客)들은 쉽게 다닌다 하니 그네들의 성심(誠心)이란 과연 감(感) 귀신(鬼神)을

하고야 말만 합니다.

길 좌우(左右)에는 머루 다래의 넝쿨이 얽혓읍니다.

 

 

  청산(靑山)에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하는 청산별곡(靑山別曲)의 고가(古歌)를 높이 부르며 지나갑니다. 깊은 동곡(洞谷)을 양분(兩分)하고서 쑥 내밀어 올린 봉이 잇으니

보연대(寶蓮臺)입니다. 

향산지(香山誌)(주1)를 거(據)하면 보연대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이태조(李太祖)가 아직 등극(登極)하기 전에 함북(咸北) 길주(吉州) 은적사(隱寂寺)에서 천일(天日) 기도(祈禱)를 시작하고 매일(每日)

나한(羅漢) 1위(位)씩 도합(都合) 천위(天位)를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일 기도를 시작하고 그 천위 나한

중에 오백 위를 석왕사로 이안(移安)하고저하여 원산(元山)까지 오는 배로 실어오고 원산서부터는 손소 모시고 매일 1위씩 옴겨오는데

귀찬은 생각이 낫든지 최후의 2위는 한꺼번모셔 왔드니 그 두 분 중에 독성(獨聖) 나한 한 분이 성을 발칵내시어 이 향산(香山) 보연

대 위로 구름을 타고 날아 오섯더라는 것입니다.

때에 마침 보현사(寶賢寺) 어떤 중 한 분이 꿈에 이 일을 보고 이상히 생각한 끝에 이 보연대로 와보니 과연 1위의 나한상이 계시엇읍니

다. 그리하여 이 정상(頂上)에 대(臺)를 짓고 봉안(奉安)하였든 것이나 지금은 봉만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그 나한도 지난 홍수(洪水)통에

조현사(曹賢寺)로 옴겨 모섯다 합니다.

다른 분에게는 정성(精誠)을 바처 한분씩 모서 오고 이분은 다른 한 분과 같이 두 분을 한꺼번에 모서왔으니 이태조도 이분에게는 홀대

(忽待)를 하신 셈이지만은 그렇다고 발칵 분노(忿怒)를 내신 나한님도 너그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온 곧인즉 유수청량(幽邃淸凉)하기 그지없는 곧이매 과연 경(景)은 잘보던 나한이든가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위태(危殆)한 석장(石嶂)을 붙어 올라 갈 것을 생각하니 손발이 떨릴 뿐입니다. 까딱하면 참말 보연대로 가는 길입니다.

신통력(神通力) 많은 나반존자(那般尊者)(주2)를 불러 생명(生命)을 의탁(依託)하지 않으면 안 될 곳입니다.

보연대 ! 실로 만월경개(滿月景槪)가 이만한 곧 어대오리까. 편하고 시원하기 어대가 여기보다 더 나으리까.

 

 

  천태동(天台洞) 비로동(毘盧洞)을 좌우에 끼고나려

  계복(溪腹)에 높이솟아 보연대를 이루도다

  극락(極樂)이 달리 어대랴 나는 옌가 하노라

 

 

이 보연대를 돌아 다시 한 동천(洞天)을 만나니 삼성동(三聖洞)입니다. 큰 내를 건너서 우거진 풀 속을 헤처드니 삼성암(三聖庵)이란

조고마한 폐암(廢庵)이 잇읍니다.

벽(壁)에는 불상(佛像)대신 위목(位目)을 써붙였는데 중앙(中央)에는 남무금윤보계치성광여래불(南無金輪寶界熾盛光如來佛)이라 썼

고 좌우에는 보처(補處) 두 분을 �읍니다. 그러나 실상 이 삼성암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세 성인(聖人)을 모시었던 암자

(庵子)이매 지금은 없어진 저 단군암(檀君庵)과 아울러 가장 오랜 암자들임이 무론(毋論)이나 이렇게 폐(廢)하였으니 장차 이 산에서까

지 삼성(三聖)뫼신 자취를 잃을 것입니다. 자손의 선조(先祖) 신봉(信奉)이 나날이 엷어저감을 여기에 빙자(憑藉)하여서도 알겠습니다.

  방바닥에는 목침(木枕) 두어개가 굴려있고 떨어진 돗자리와 남비가 있읍니다. 아직 칠팔월이 아니니 삼묏군이 왓을 것도 아니고 아마

피나무껍질 벗기는 사람들의 자취인 모양입니다.

「아 못살고 가난한 자손(子孫)들이 이 산중(山中)에와 나무겁질을 벗기다가 밤이 되면 여기와서 자는 것은 저절로 님의 품속에 안기는

것이로다.」하고 생각하니 더욱더 늦겁습니다. (중략)

 

그리고 우리는 우물을 찾아가 거기 놓인 박아지로 물을 떠먹은 뒤에「고맙습니다. 목마른 길손에게 물을 떠먹게 하신 은혜 고맙습니다.」

라고 조이에 써서 박아지로 눌러놓고 다시 우편(右便) 송림(松林) 속으로 들어 암석(岩石)의 덩성이를 넘어갑니다.

  길도 없는 곧을 그저 헤매면서 갑니다만 동일(東日) 화상(和尙)만 믿고 따라갑니다. 벼래를 돌아가며 천장만장(千丈萬丈) 떨어진 앞을

내려다보니 손발과 가슴이 그냥 잇지를 아니합니다. 절벽(絶壁)에 붙은 채 떨고 섯을 때에「아이고 내가 구트나(주3) 여기와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발앞이 더 캄캄해집니다.겨우 한고비 지나놓고 보니 또 그런 된불재를 넘게되고 이러케하기를 �십번이나 하엿습니다.

과연 남의 생명(生命)과 작난하는 곧입니다. (중략)

 

이리하여 산을 4, 5개나 넘고나니 위암초벽(危岩峭壁)이 쌓이고 모여서 하늘닿게 높은 한 봉(峰)을 이루니 이것이 우리가 찾아온 향로

(香爐峰)입니다.「어허! 향로(香爐), 향로, 당신을 뵈오려고 저런 험(險)을 지나 왓읍니다.」하고 향로봉을 향(向)하여 아뢰고 나니 반

기도 하고 밉기도 한 것이 마치 어린애가 울며 기대리는 엄마를 본 것 같앗읍니다. 봉(峰)우에 기어오르니 일망무제(一望無際)! 향산

(香山)의 모든 산봉(山峰)이 모조리 이 향로봉의 발밑에 업대어 혹은 통념(通念)도 하는 것 같고 혹은 기도(祈禱)도 하는 것 같으며 혹은

재롱도 부리는 것 같고 또 혹은 아양도 피우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서산선사(西山禪師)로 하여금

 

  萬國都城皆蟻垤, 天家豪傑等醘鷄

  一窓明月淸虛心, 無限松風韻不齊

  ( 만국도성개의질, 천가호걸등갑계

    일창명월청허심, 무한송풍운부제 )(주4)

 

라는 대시(大詩)를 읊게 하엿음적 합니다. 소위 향산(香山) 팔만사천봉(八萬四千峰)이 다 각하(脚下)에 깔렷을 뿐 아니라 위원(渭原),

초산(楚山), 창성(昌盛), 희천(熙川), 운산(雲山), 북진(北進), 태천(泰川), 정주(定州), 박천(博川), 영변(寧邊), 안주(安州), 개천(价川)

등지(等地)가 병풍(屛風)두르듯 아득한 하늘가를 둘럿읍니다.「어허! 장활(長闊)한 천지(天地)로다」

하고 봉두(峰頭)에 펄석 주저앉으니 눈물도 웃음도 깃븜도 슬픔도 괴로움도 편안함도 아무것도 없이 다만 무언무상(無言無想)의 등신

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 같앗읍니다. (중략)

나는 한참 후에 다시 눈을 뜰 때 참으로 호연(浩然)한 기분(氣分)을 막을 수가 없음을 더욱 더 강렬히 늣겻읍니다.

 

 

  현애(懸崖) 천만장(千萬丈)이기 승천(昇天)한줄만 여겻드니

  다시금 우러보니 하늘이상긔 구만리(九萬里)라

  마음도 천지(天地)를 본받아 절로 호탕(浩蕩)하더라

 

  그리고 나는 다시 서산(西山)의 시(詩)로는 부족함을 깨달앗읍니다. 만국도성(萬國都城)을 개암이둑이라하고 천가호걸(天家豪傑)을

촛벌레라 본 서산의 시에 항의(抗議)하고 싶습니다.

 

 

  보이도 않는 도성(都城) 개암이둑(주5)이라곤 웨 하는고

  허허 호걸(豪傑)이 어대잇어 촛벌레론들 웨 비긴고

  건곤(乾坤)이 아득할 뿐이니 없다한들 어떠리

 

 

나는 향로봉(香爐峰) 우에서 이같이 호기(豪氣)를 부렷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호기부릴 무엇이 잇어 그런것이 아니오 구소(九霄)(주6)

솟아오른 향로 그것의 힘일 것뿐임을 다시 한 번 증언(證言)함으로서 향로의 거륵하고 크고 높고 장(壯)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략)

 

 

(향산유기(香山遊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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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주석

주1) 향산지(香山誌) : 태율(兌律, 1695~ ? )의 <월파집>에 수록된 묘향산 기행문.

태율은 조선 후기의 스님. 호는 월파(月波), 성은 김(金), 이름은 김종건(金從建), 본관은 전주. 1695년(숙종 21)12월 24일 가평 (嘉平)에서 태어났다.

1709년(숙종 35) 15세에 묘향산의 불지암(佛智魔)에서 삼변(三卞)에게〈사기〉를 배우고, 뒤에 설봉 회정(雪峰醫律)에게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널리 대종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723년(경종 3) 안릉(安陵)의 원적사(圓寂寺) 환몽 굉활(幻夢 宏關)을 만나 경을 배웠다.

영남과 호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무경 자수(無竟 子秀) 남악 (南岳) 호암 체정(虎岩體揮) 영해 약탄(影海 若坦) 상월 새봉(露月 璽 )등의 대종사를

찾아가 경전의 깊은 이치를 들었는데, 체정의 가르침이 가장 깊이가 있었다 한다. 다시 묘향산에 돌아와서는 당(種)을 건립하고 스님들을 교화하기

30여 년이나 하다가 영조 때(1725~ 1776) 입적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북방(北方)의 화상'이라 하고 존경했다.

저술에는〈월파집〉1권이었다. 1771년(영조 47) 5월 개간한 판본이 전하며, 해월 도일(海月 道一)이 편록했다. 시와 게송 향산지(香山誌)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월파평생행적,월파집,이조불교)

 

주2) 말세의 복 밭이라 하여 신앙(信仰)하는 아라한(阿羅漢, arhat, (팔)arahant, 나한)아라한은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컬음.

 

주3) ‘구태여’의 옛말

 

주4) 많은 나라 도성이 모두 개미둑 같고, 세상에 호걸이란 촛벌레 같네 / 한쪽 창 밝은 달 빈마음을 맑게하고, 끝없는 솔바람 소리 그지없음 들려주네

 

주5) 개미둑. 아주 작은 언덕을 말함

 

주6) 하늘. ‘구천(九天)’의 동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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