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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자료

雪岳山의 地圖 DLDIR

by 청아 김종만 2012. 7. 28.

 崔宣雄의 山과 地圖 이야기        작성자: 최선웅  작성일: 2005. 1. 13
 
 雪岳山의 地圖

 고지도에 나타난 설악산

 현존하는 고지도 가운데 설악산의 명칭이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첨부되어 있는 도별도(道別圖)일 것이다. 이 도별도는 목판본인데 판심(版心)에 ‘東覽圖’ 라 각인되어 있어 흔히 동람도라고 불리는데 강원도

 동람도를 보면 산 표시와 함께 ‘雪嶽’이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는 동해안의 해안선과 수계, 산 기호 등 지형의 표현이 단순한 약도 형식으로 그려져 있으나 북한강과 남한강 그리고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 소양강이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고, 관읍(官邑)과 산의 위치도 크게 어긋나 있지 않다. 세종 14년(1432년)에도 신찬팔도지리지

 (新撰八道地理志)가 간행된바 있어 지도가 전해졌다면 설악산의 이름은 연대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지도1>설악산 지명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도별도(道別圖).중종 25년(1530년)에 간행.


 그 이후로는 제작 연대가 17세기 초인 1640년대로 추정되는 팔도도별도(八道道別圖)란 지도첩인데 채색필사본인 이 책의 강원도 지도는

 동람도와 흡사하게 그려 졌으나 설악산의 명칭이 ‘雪岳’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지도2>설악산의 명칭이 雪岳으로 나타난 팔도도별도.
 
 1640년대 추정 채색필사본 지도첩.현종14년(1673년) 김수홍(金壽弘)이 제작한 조선전도인 조선팔도고금총람도(朝鮮八道古今總覽圖)에

 는 설악산의 명칭이 ‘雪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해동지도(海東地圖)와 1780년대 제작된 것

 으로 추정하는 여지도(輿地圖)에는 ‘雪岳山’이라는 정식 명칭이 처음 나타난다.


 
 <지도3>雪岳山이라는 정식 명칭이 처음 표기된 여지도. 1780년대 제작 추정.
 
 1861년 고산자 김정호에 의해 대동여지도가 제작되기 이전의 지도에는 설악산의 명칭이 ‘雪嶽’, ‘雪岳’ ,‘雪山’, ‘雪岳山’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雪岳’으로 표기된 지도가 가장 많다.



 <지도4>설악산이 雪山으로 표기된 조선팔도고금총람도의 일부. 현종 14년(1673년)김수홍  제작.


조선 시대를 걸쳐 축적된 지지(地志)와 지도학적 성과를 총합

하여 집대성한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는 아니지만 도곽(圖廓)

의 구성이나 표현방식, 수록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지형도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설악산이 표시된 12층 1면의 지도를 보면 백두대의 큰 산줄

기와 지맥, 수계, 도로 등이 보이고, 점선으로 표시된 행정경계

산줄기에 구멍을 뚫어 표시한 고산성(古山城)을 읽을 수 있

다. 지금의 속초 자리엔 관읍표시는 없으나 영랑호와 청초호가

그려져 있고 비선대가 ‘秘仙坮’로 표시되어 있으며, 관읍으로서

는 양양이 읍치(邑治)로 표시되어 있고, 내설악의 남교(嵐校),

외설악의 원암(元岩), 강선(降仙)에는 역참(驛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쪽을 살펴보면 연수파령(連水坡岺)으로 표기된 미시령이 당

내외 설악을 넘는 가장 큰 길임을 알 수 있고, 지형은 맞지 않으

한계령으로도 작은 길이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산내에는 울산암을 지칭하는 천후산(天吼山), 설악산, 신흥사,

조암, 봉정암, 백담사 등의 지명이 있고, 대폭(大瀑)이라는

지명이 두 군데 있는데 내설악에 있는 것은 대승폭포, 외설악에

있는 것은 토왕성폭포를 나타내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지형과

지명의 위치가 현재와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지도5>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설악산 부분.


 조선 후기까지의 지도는 일일이 붓으로 그린 필사본이 대부분이고, 다량 인본을 위해 판각에 의한 목판본이 있다. 김정호도 처음에는

 필사로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東輿圖)를 제작하였고, 직접 판각기술을 배워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제작하였다.지금으로 따지면

 지도의 기획에서부터 조사, 편집, 제작, 인쇄, 제본까지의 전 공정을 혼자서 다 해냈다는 말이 된다.

 일제 강점기의 설악산 지도19세기 말 세계 열강 제국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조선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필리

 핀을 차지하려는 미국의 묵인아래 조선을 강점하고, 통치차원에서 일본군 육지측량부대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조선인 측부를 고용하

 여 조선 땅을 측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강제 합방 전까지 약도 형태의 축척 5만분의 1 신속측도(迅速測圖)가 제작되었고, 합방이후 약도를 수정 보완하여 제2차 5만

 분의 1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후 6년간에 걸쳐 본격적으로 삼각측량과 지형측량을 실시하여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조선반도 전

 역의 1:50,000지형도 722매를 완성하였다. 이렇듯 우리 땅에 대한 최초의 실측지도가 일제에 의해 제작되어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

 황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요 돌이킬 수 없는 수모라 아니할 수 없다.  

 도엽명 ‘雪岳山’의 지형도를 보면 지도 좌측에 부호(符號)와 도력(圖歷)이 기재되어 있는데 측량 연도는 1915년(일본연호 大正 4년),

 발행일은 1917년(大正 6년) 5월 30일이고, 저작권 소유는 조선총독부,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로 기재되어 있다. 이 지도는 경도

 15´, 위도 10´차의 경위도 좌표에 의해 도곽을 구성하고 있으며, 색도는 먹 1색도이다.

 지도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지형 표현의 왜곡이 심하고 현재의 지형과 판이하게 다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당시 일제는 명치유신 이후

 구미로부터 측량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기술자를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 파견하여 독자적인 측량술을 축적하여 측량 및 지도제작 기술

 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으나 평판측량에 의존했기 때문에 측량이 용이한 도로변이나 개활지는 비교적 정확하나 접근이 용이하지

 못한 산악지형은 관측(觀測)에 의해 개략적으로 작도하였기 때문이다.



 <지도6>1917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설악산 지형도.


 이처럼 지형을 나타내는 등고선의 표현은 개략적이나 울산암을 비롯 저항령 일대, 수렴동 입구, 공룡능선, 안산, 대승폭, 오색 부근에는

 바위표시가 분류별로 세세하게 표시되어 있고(천불동 계곡에는 바위 표시가 없음), 설악산 전역에 활엽수림, 침엽수림 등으로 구분되는

 산림기호가 표시되어 있어 지형도로서의 면모는 다 갖추고 있다.

 이 지도에 표시된 산길을 살펴 보면 ①내설악 로동(길골)에서 저항령을 넘어 정고리에 이르는 길, ②백담사에서 영시동, 원명암, 오세암

 을 거쳐 마등령을 넘어 정고리에 이르는 길, ③오세암에서 가야동 상류를 가로질러 봉점암을 거쳐 정상에 오른 후 관모봉 능선을 따르다

 가 관터골로 내려 서 마산리에 이르는 길, ④백담사에서 대승골을 거슬러 대승령을 넘어 자양전에 이르는 길만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설악산의 지세가 험하여 당시로서는  내설악의 수렴동 계곡이나 십이선녀탕 계곡, 외설악의 천불동 계곡은 접근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등산로도 없고 계곡도 밋밋하게 그려져 있다.

 1939년 1월 조선산악회의 김정태, 방현, 엄흥섭 등이 마등령, 화채봉 경유 초등반했다는 기록과 1955년 10월 서울문리대산악부 등반대

 (유홍렬, 손경석외 24명)가 천불동, 화채봉 경유(양폭 전에서 화채봉으로 올라 선 것 같음) 초등반한 기록, 1958년 1월에 슈타인만 클럽

 과 서울공대 합동대(전담, 고재경, 최영식)가 천불동 계곡을 초등반한 기록만 봐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일제에 의해 제작된 5만분의 1

 지형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때 까지 사용되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미 군정청이 이 지형도의 원판을 인수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육군본부로 이관되

 었다. 정부수립 초기는 모든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혼란기여서 정부에서 측지사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이 당시에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육군본부 산하 측지부대에서 일제가 제작한 지형도를 수정하여 임시로 사용하였다.



 <지도7>1957년 민수용으로 제작된 1:50,000설악산 지형도.


 1957년(단기 4290년) 민수용으로 발간된 1:50,000지형도를 보면 형태나 내용이 일제 5만분의 1 지형도와 똑같다. 다만 인쇄 색도가 3색

 (먹, 적, 청색)인것과 지명을 한자와 한글을 병기한 것 뿐이다. 손으로 새로 쓴 지명은 한자 지명 위에 한글을 표기했는데 ‘오세암’의 ‘세’

 자가 빠져 ‘오암’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지명을 썼던 사람이 ‘세’자 판독이 안되었거나 획수가 많아 빼놓고는 잊어 버린 것 같다.

 이 지도는1962년 내무부 산하에 국립건설연구소가 설치되어 미군이 제작한 군사용 1:50,000 지형도를 부분적으로 수정한 민수용 지도

 가 나오기 까지 사용되었다. 1960년 이후의 설악산 지도1958년 천불동 초등반 이후 한국산악회를 비롯 각급 학교 산악부의 설악산 등반

 이 빈번해지고 세간에 설악산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설악산에 관한 최초의 종합 안내서랄 수 있는 1960년 3월에 발행된 「雪岳山探勝

 引導誌」에 ‘설악산탐승약도’, ‘장수대행조감도’, ‘내설악조감도’ 등 3매의 안내도가 실려 있는데 ‘내설악조감도’에는 수렴동, 쌍폭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는 탐승로가 그려져 있고, 십이탕의 탐승로는 소개되어 있으나 천불동 계곡은 안내가 없다. 안내도에 백운동이 처음 등장

 하고 대청봉이 ‘晴峯’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8>설악산탐승인도지에 수록된 설악산 탐승 약도.

 <지도9>설악산탐승인도지에 수록된 장수대행조감도.

<지도10>설악산탐승인도지에 수록된 내설악조감도.


 필자가 수집한 설악산 지도 가운데 1960년대 초반 어느 산악회보에 실렸던 것을 잘라 접합한 것 같은데 연대나 출처를 기록해 놓지 않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등사판으로 제작된 것 같은 이 지도는 등고선이 100m 계곡선만 표시했으나 일제 지형도를 수정 보완한 측지부대

 1:50,000지도와 내용이 동일하다. ‘오세암’이 ‘오암’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측지부대 지도를 기도(基圖)로 해서 그린 것 같다.

 그러나 수렴동 입구에 천왕문을 위시하여 거인용담, 쌍폭이 첨기되어 있고, 천불동계곡에는 비선대, 자진바위, 이호담, 귀면암, 만물상,

 신선대, 형제암, 오련폭 등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으나 위치가 맞지 않고, 귀면암을 암자로 착각하고 절 기호(卍)를 붙인 것이 재미있다.


 <지도11>1960년대초 작자 미상의 설악산 지도.


 설악산의 개념도가 가장 처음 인쇄본으로 제작된 것은 1962년 7월 우리나라 최초의 등산 이론서인「登山百科」445쪽에 실린 ‘雪岳山코오스圖’일

 것이다. 이 지도 역시 손으로 그린 지도로서 큰 산줄기를 지성선(地性線)식 개념도로 표시하였고, 지도 범례까지 그려져 있다.

 지명은 한글과 한자를 섞어 표기 했는데 수렴동 입구에는 옥문봉(玉門峯), 천불동 계곡에는 복룡폭(伏龍瀑), 삼호폭(三壺瀑), 천수대(天壽台) 등

 생소한 지명이 등장하고, 흑선동(黑仙洞)과 제단곡(祭壇谷), 곡백운(曲白雲), 진백운(眞白雲)등도 처음 등장하는 지명이며, 천불동 계곡의 등산

 로도 처음 등장한다.

 <지도12>손경석의 등산백과에 수록된 설악산 개념도.


 이 책은 1967년 10월 책 제목을「登山의 理論과 實際」로 변경하면서 재판이 발행되었는데 부록으로 붙은 ‘雪岳山登山COURSE圖’는 손으로 그린

 개념도지만 축척 1:10만을 가리키는 스케일바가 그려져 있고, 오세암과 수렴동의 위치가 틀렸으나 내용은 지금까지 나온 설악산 지도 가운데 가장

 충실한 지도로 평가된다. 내설악에 숨은폭포와 쌍폭 아래에 용담폭이 처음 등장하고, 봉정암 옆에 산장 표시가 그려져 있다.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이 지도는 서울대문리대산악부의 임광국 씨가 그린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도13>등산의 이론과 실제에 실린 설악산 개념도.


 1966년부터 국립건설연구소는 네덜란드와 항공사진측량사업 협정을 체결하고 항공사진 측량에 의한 지도제작 기술을 도입하여 1967년부터 1974

 년까지 남한 전역의 1:25,000지형도 762도엽을 제작하고, 이어 1:25,000지형도를 축소 편집하여 1:50,000지형도 239도엽을 완성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비로소 우리 손으로 제작한항공사진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형도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지형도의 출현으로 설악산의 지도도

 정확성을 유지하게 되고, 현장 조사를 통해 지형, 지물의 위치와 명칭도 명확해지기 시작하였다.


<지도14>산수회 간행 등산수첩 부록으로 실린 설악산 개념도.



1967년 6월 ‘산수회’에서 간행한「등산수첩」부록 지도인 설악산 지도는 개념도

형식이지만 지명을 활자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라 할 수 있다.

「登山의 理論과 實際」에 실린 설악산 지도를 참조한 탓인지 수렴동과 오세암의

위치가 동일하게 틀려 있음을 알 수 있고, 천불동 계곡에 양폭이 처음 등장한다.

 이 지도는 ‘산수회’ 멤버였던 이우형 씨가 제작한 것이다.등산 잡지에 가장 먼저

실린 설악산 지도는 1969년 5월에 창간된 「등산」창간호 25쪽에 실린 지도이다.

이 지도는 1969년 2월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의 조난소식을 특집으로 다룬

기사에 조난지점을 가리키는 지도로 ‘죽음의 계곡’이란 지명이 설악산 지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도가 된다.
 
 <지도15>월간 등산에 실린 설악산조난지도.






 개념도 형식의 지도이지만 전국의 75개 산악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등산코오스안내집」이 1971년 5월 교진사에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지도

 를 뺏다 넣었다 할 수 있는 바인다철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등산안내집으로 35번째가 설악산 지도이다.

 이 지도는 축척이 10만분의 1이고, 개념도에서 처음으로 군청색과 적색을 사용한 2색도 지도이다. 내설악에는 백담산장의 위치가 틀려 있으나

 귓대기골과 서북주능 등산로가 처음 표기되었고, 외설악에는 설악골과 양폭산장, 희운각산장 등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 당시 필자는 김용성 편

「등산가이드」를 발행하고 산악 관련 서적 출판을 시작한 교진사 송종배 사장의 권유로 이 회사 편집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책에 들어가는 등산

 지도와 해설을 직접 쓰고 그렸다.

 


 <지도16>등산코오스안내집에 수록된 설악산개념도.


 등산백과를 펴낸 손경석 씨는 이어 등산•하이킹 시리즈란 소책자를 펴내기 시작한다. 1971년 7월에 발행된 「登山•하이킹 씨리즈③ 雪嶽山」에

 부록으로 실린 설악산 지도는 지금까지 나온 설악산 지도 중 규격이 가장 크고 4색(먹, 청, 적, 녹색)으로 제작된 당시엔 가장 딜럭스 한 지도라고

  평가된다. 이 지도는 가로 70cm, 세로48cm 크기이며 축척은 1:30,000이고, 지형은 100m간격 등고선 위에 산줄기를 녹색으로 표현하였다.

 지형 지물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공룡능, 용아장성능, 서북주능, 북주능, 화채능, 동남능 등 능선의 명칭과 외설악의 소토왕골, 잦은

  바위골, 용소골, 건폭골 등의 계곡명도 처음 등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의 찻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도로가 난 것이 이 때쯤이 아니

 었나 가늠된다. 지도 우측 하단에 ‘1971. 4 李又迎 제작’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李又迎’은 고 이우형(李祐炯) 씨의 개명하기 전 이름이다. 또한 이

 책에는 세련된 필치로 그려진 ‘외설악천불동계곡 조감도’가 첨부되어 있다.


 <지도17>등산하이킹 시리즈 3 설악산 지도의 일부.


 <지도18>등산하이킨시리즈 3에 실린 천불동계곡 조감도의 일부.


「登山코오스案內集」을 펴낸 교진사는 가스통 레뷰파의 「雪과 岩」번역판, 김홍철의 「즐거운 산노래」를 잇달아 발간하면서 1971년 11월

 우리나라 최초로 알파인 다이어리를 만든다. 「’72 alpine diary」란 제호로 발간된 이 다이어리는 당시 국내 산악인들의 사진과 산악지도를

 곁들여 편집한 책으로 여기에 게재된 설악산 지도는 지명을 영문으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일 것이다. 지도 우측 하단에 필자의 이니셜인 ⓢ가

 들어 있다.


 <지도19>영문 표기 설악산 지도.

 1973년 10월 설악산악회 제공으로 제작된 ‘雪岳山 登山코오스 案內圖’는 축척과 범례 등 형식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낱장 지도일 것이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49 cm, 세로 38cm이고, 지형의 표현은 100간격 등고선과 산줄기를 혼합한 방식이며, 색도는 4색도이다. 지도 우측에 설악산

 의 개관, 등산 코스 안내, 유의사항, 범례, 방위표가 표시되어 있고, 지도 하단에는 축척 표시와 함께 스케일 바가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안광옥

 씨 소개로 설악제에 맞춰 필자가 먹제도 방식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지도20>설악산악회 제공 1:50,000설악산 지도.


 1970년대까지의 지도 제작은 먹제도라고 불린 착묵제도(着墨製圖) 기법이었는데 제작 방법은 제작코자 하는 산의 지형도에 제도할 부분의 도곽

 을 잡은 후 트레싱 페이퍼를 얹고 제도펜(丸펜 또는 마루펜이라고도 함)과 곡선 제도기(烏口)에 먹물을 찍어 형상대로 그린다. 이때 등고선판과

 도로판, 하천판, 지명판을 별도로 작성해야 하며,각 판을 맞추도록 지도 상하좌우에 십지형의 레지스터 마크(흔히 돔보라고 함)를 기입한다.

 지명판은 글자를 유형별로 분리하여 서체와 크기를 정하여 인쇄소로 보내면 활자 조판을 한 후 아트지에 교정인쇄를 한다. 이것을 일일이 잘라

 트레싱 페이퍼위에 풀로 붙이는 전사 작업을 한다. 이렇게 작성된 제도 원도를 사진제판소로 보내 제판용 카메라로 촬영을 하여 네가 필름을 작

 성한다. 당시에는 이 네가 필름 상태로 난백(卵白)판 방식에 의한 인쇄를 하였다. 

 1980년대 이후의 설악산 지도1970년대 우리나라 지도업계는 외국으로

 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스크라이브(Scribe)제도 기술이 점차적으로 보급되면서 착묵제도에 의존하던 지도 제작이 스크라이브 제도로 변화되어

 가는 시기를 맞이한다.그간 등산 관련 출판에 종사하던 필자도 1975년 일본지도를 제작하여 수출하던 동양출판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

 도 제작업에 뛰어 들었고, 이후 일본 최대의 지도출판사인 쇼분샤(昭文社)와 손을 잡고 쇼분샤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 오면서 1977년 한국소문사

 를 설립하게 되고 필자도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편집부장 직을 맡게 된다.

 1969년 6월 산악잡지「山水」를 창간하고 뒤에 지도 제작에 뛰어든 이우형 씨와 필자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산악잡지를 창간하였고, 지도

 제작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하였다. 잡지 할 때부터 형님 아우하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지도 회사인 중앙지도문화사에

 서 관광지도 제작에 참여하고 있던 그가 1977년 제주도 지도를 제작하겠다고 필자의 회사를 찾아 왔다.

 조사 편집은 그가 맡고, 지도는 필자의 회사에서 제작하여 1978년 8월 최신 스크라이브 제도 기법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인 ‘綜合濟州

 道總圖’가 발간되었다. 이우형 씨는 이 지도로 일약 유명해져 도하 신문에 그에 관한 기사가 연일 게재되어 한껏 고무되어 있던 중 1980년 1월 불

 법지도를 간행 배포한 혐의로 중부경찰서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입건 구속되고 말았다. 이는 국립지리원의 지형도를 사용하여 지도를 제작할

 때는 측량성과사용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산악계와 성우협회의 탄원과 도하 신문의 구명 기사로 얼마 후에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 났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더 유명해져 ‘현대판 김정호’란 트래이드 마크가 붙게 되고 본격적으로 지도 제작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건이 있은 뒤 이어 제작한 지도가 ‘登山地圖 雪嶽山’이다. 이 지도 역시 조사 편집은 이우형 씨가 하고 필자의 회사에서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제작 기법이나 표현 방식, 표현 내용, 형태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설악산 지도의 일대 획을 긋는 지도라 할 수 있다.

 지도의 축척은 1:50,000이고, 지도의 크기는 가로 76.5cm, 세로52cm로 지금까지 제작된 설악산 지도 중 가장 크며 색도 또한 6색도(먹, 청, 적,

 황, 갈색, 회색)로 가장 많은 색상을 사용하였다. 등고선은 지형도와 같이 20m 주곡선을 전부 채용하였고, 고도를 구분하기 위한 채단과 입체감을

 표현한 힐 쉐이딩(Hill Shading)기법까지 도입한 최초의 완벽한 등산지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국립지리원의 측량성과 사용승인(승인번호 326호

  1980.10.2)을 받은 최초의 설악산 지도로도 기록될 것이다.


 <지도21>스크라이브 기법으로 제작된 최초의 설악산 지도.


 지금은 컴퓨터 시대가 되어 없어진 스크라이브 제도 기법은 착묵제도와 달리 쓰이는 재료와 도구부터 다르다. 제도용지는 포리에스텔 베이스에

 노란색 차광막을 도포한 스크라이브 베이스(Scribe coat)가 사용되고, 스크라이브 세트(Scriber)라고 불린 제도용구 이외에 이 기법과 연관되는

 다양한 재료와 도구들이 많았다. 지도 제작은 기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작하고자 하는 주제가 결정되면 지도의 축척, 지도의 크기, 표현 방식,

 표현 내용, 자료 수집, 현지 조사, 도식(圖式)규정, 제도원고, 지명원고 등의 작업이 선행된 다음 제도 작업에 들어 가게 된다.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진 스크라이브 제도 기법에 대해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라도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1. 스크라이브 베이스에 매직코트라는 감광액을 칠한 뒤 지도 원도(네가 필름)를 밀착시켜 빛을 쪼이고 현상을 하면 스크라이브 베이스에 그리고자

   하는 지도의 형상(이미지)이 나타나게 된다. 이를 흔히 <스크라이브 이미지 올린다>고 한다.    

 2. 정해진 도식규정에 따라 선호, 선폭 규격에 맞는 각종 스크라이브 용 바늘을 제작한다. 재질은 강철선인 피아노선을 12mm 길이로 잘라 불에 달

  구면서 연마한다. 바늘 제작의 정도(精度)에 따라 제도의 품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바늘을 정밀하게 잘 만들어야 한다.

 3. 스크라이브 세트 해드에 바늘을 장착하고 도식에 따라 제도한다. 이때 제도 책상은 밑에서 불이 비치는 라이트 테이블이어야 한다. 결국 스크라

  이브 제도는 차광막을 바늘로 긁어 내는 방식이다. 스크라이브 세트는 바늘을 끼우는 해드 부분이 회전하는 회전식과 고정되어 있는 고정식이 있다.

  직선은 고정식으로 그리고, 등고선이나 하천 등은 회전식으로 그린다.

 4. 스크라이브는 색판별로 등고선판, 하천판, 도로판, 경계판 등을 별도로 제도해야 한다. 차후 지명판이나 색판, 필름합성을 위해서 각 판을 일치시

  킬 수 있도록 레지스타 폰치로 각 판 하단에 동일하게 구멍을 뚫어야 한다. 이를 흔히 돔보 구멍이라 하고 그 구멍에 맞는 돔보 핀에 작성된 판들을

  차례로 끼우면 모든 판을 일치시킬 수 있다.

 5. 제도가 끝나면 암실에서 밀착 프린터기로 스크라이브 판에 제판용 필름을 얹고 각 판을 차례로 밀착한 후 현상하면 한장의 포시 필름이 된다. 이

  작업을 필름 합성이라 하고 합성된 포시 필름을 종합포시라 한다.

 6. 지명 붙이는 작업을 스틱 업(Stick-up)이라 하는데 지명은 지명원고를 작성한 작업자가 주기규정에 따라 사진식자를 치기 위한 원고를 만들고 그

  원고로 사진식자를 친다. 이때 막이 떨어지는 스트립 필름(Strip film)을 사진식자기에 장착하고 식자를 친후 현상하면 주기 스트립이 완성된다.

  스틱 업은 기판인 종합포시 위에 트레스터(프라스틱 시트에 마트 가공하여 제도용지로 사용하는 시트)를 올리고 스트립 필름에 인자된 지명을 일일

  이 엣징 나이프로 자른 후 핀셋으로 집어 제 위치에 놓고 붓으로 MEK를 찍어 바르면 스트립 필름이 트레스터 위에 붙게 된다.

  MEK는 용제로 냄세가 지독한 화공약품인데 이는 스트립 필름을 접착하는 것이 아니라 트레스터의 막면을 녹이면서 붙게 하는 것이다. 이 작업 역시

  라이트 테이블 위에서 행해지고 숙련이 되어야 가능한 작업이다.

 7. 지도에 색을 넣기 위한 작업을 색판 작업또는 마스크판 작업이라 하는데 색을 넣고자 하는 부분 즉 도로나 수부, 단체, 시가지 등은 각기 해당 스크

  라이브 판을 밀착하여 포시를 작성한 후 색을 넣고자 하는 부분을 세필로 차광액인 오페크(Opaque fluid)를 칠해야 한다.

  오페크 칠한 판을 밀착하면 색판용 네가 필름 즉 마스크판이 된다. 나중에 스트립 코트(Strip coat)와 필코트라는 마스크용 시트가 생산되어 어려운

  오페크 작업을 하지 않게 된다. 스트립 코트는 칼로 필요한 부분을 잘라 뜯어내는 시트이고 필코트는 스크라이브 판을 밀착후 현상하면 자동으로 원

  하는 마스크판이 작성되는 시트이다.

 8. 지도에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한 음영(陰影)은 힐 쉐이딩 기법으로 작화하는 것인데 등고선 기판 필름위에 AK퍼플(폴리에스텔에 일본 종이를 양면

  으로 접착시켜 만든 제도용지)이라는 용지를 올려 놓고 미술용 연필심이나 목탄을 갈아 린시드유를 섞어 찰필(擦筆)로 음영을 그린다. 음영은 북서

  방향 45도 상공에서 빛이 비쳐 형성되는 그림자를 상상하고 그려야 하기 때문에 등고선만으로 지형을 판독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림 소질이

  있어야 한다. 지도 제작 기법중 가장 어려운 기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도 제작의 원로이신 이상만 선생과 ‘고산자의 후예들’의 이재권 씨가 유일한

  기술자다.

 9. 이렇게 작성된 중간판(제작 과정중의 모든 제도판의 총칭))은 최종적으로 40~50매 가까이 된다. 모든 판을 색별로 분리하여 암실에서 필름 합성

 작업을 한다. 이때 색의 농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망점 스크린(Tint Screen)도 도식규정에 맞는 스크린을 사용해야 한다. 중간판이 복잡한 것은 8중

 내지 10중까지 합성 작업을 하게 되는데 최종적으로는 6색도인 경우에는 6매의 포시 필름이 작성되는 것이다. 제판용 필름도 초기에는 암실용을 사용

 했으나 명실용 필름이 개발되어 편리하게 된다.

 10.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몇 차례 교정과 수정 작업을 행하고 인쇄용 최종 합성 포시를 다시 작성한다. 이 인쇄판을 색별로 인쇄하면 다색판 지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공정을 거쳐 한 장의 지도가 완성되기 까지는 40~60일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   
 
 1982년 8월 등산의류를 제조하는 코오롱스포츠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한 등산지도 시리즈 가운데 「설악산국립공원」 지도가 있다. 발행은 ‘서전산업’

 으로 되어 있지만 지도제작은 현재 ‘고산자의 후예들’이라는 지도출판사의 대표인 이재권 씨가 제작한 지도이다. 그는 이후 ‘월간 산’ 잡지의 산악지도

 를 제작하게 되고 코스 조사를 다니다가 산쟁이의 길을 걷게 된다.


 <지도22>코오롱스포츠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한 설악산 지도.


 1984년 10월에 이우형 씨가 운영하던 광우당에서 발간된 「山으로 가는 길」은이우형 씨와 안경호 씨가 공동으로 펴낸 등산 코스집으로 철제 바인

 다철로 제본된 책이다. 이 책 17쪽에 실린 설악산 지도는 지형의 표현이 특이하다. 산줄기를 백색으로 처리하고 음영을 넣어 입체감이 나게 한 지도

 로 이우형 씨가 고안해 낸 새로운 표현 기법이다.


 <지도23>山으로 가는길에 수록된 설악산 지도.


 1990년 1월 성지문화사에서 발행된 「전국유명100산 등산안내지도」는 등고선이 들어간 최초의 등산코스 안내집으로 36쪽에 설악산이 있다. 이후

 증보하여 200산으로 늘려 발간하였다.


 

 <지도24>전국유명 100산에 수록된 설악산 지도.


1990년 9월에 제작된 「HANDKERCHIEF MAP 설악산국립공원」 은 필자의 아이디어 제안으로 동국대학교산악부 출신인 도창호 씨가 자금을

들여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손수건 등산지도이다.

손수건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 49cm로 100%순면 섬유에 텍스타일 용 전용 전사잉크를 사용하여 열전사 인쇄로 제작한 것이다. 설악산 외에

동해안, 한라산 등 몇 가지를 더 만들었으나 판매부진과 자금난으로 도중에 손을 들고 말았다.


<지도25>우리나라 최초의 설악산 손수건 지도의 일부.


1993년 6월 ‘고산자의 후예들’에서 제작한 「지도쪽지 설악산」은 접지 방식이 특이한 지도이다. 크리스마스 카드 형태의 이 지도는 표지를 펼치면

설악산 지도가 꽃 모양으로 펼쳐지면서 지도가 나타난다. ‘꽃접지’라 불리는 이 접지 방식은 유럽에서 고안된 접지 방식으로 한번에 지도를 펼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지도의 규격에 제한이 있다.



 <지도26>꽃접지 방식의 설악산 지도.


 1990년 8월 ‘㈜차림’ 에서 발간된 「천의 자태, 설악산」에 실린 ‘설악산관광안내도’는 동해안 상공에서 바라 본 설악산의 전경을 채색화로 그린

 조감도 형식의 그림지도이다. 설악동에 살며 사진도 찍고, 그림 소질이 뛰어난 저자 최낙민 씨가 직접 그린 작품으로 설악산 일대의 지형이 잘

 표현된 수준급의 작품이다


 <지도27>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설악산관광안내도.


 1994년 11월 삼부지도문화사에서 제작한 「가리봉•설악산」 지도는 물에 젖지 않고 찢어지지 않는 종이인 ‘타이벡’이란 특수지에 인쇄한 지도이다.

 타이벡(Tyvek)은 미국 듀폰사가 개발한 제품으로 고밀도 폴리에틸렌 연속 섬유를 폭발 방사후 열 접착하여 만든 섬유 원단으로 내구성이 탁월하고

 가볍고 부드럽다.1995년 9월 평화출판사에서 펴낸 「국립공원가이드 2 설악산」에 부록으로 실린 설악산 지도는 일본 유포코퍼레이션에서 제작한

 폴리프로비렌 수지를 주원료로 하는 합성지인 유포(Yupo)지에 인쇄한 지도이다.


 

 <지도28>물에 젖지 않는 유포지로 제작한 설악산 지도.


 1995년 4월 국립공원협회 설악산지부 이름으로 발행된「雪嶽山國立公園」지도는당시 설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소장이던 정유희 소장이 북한산

 에 이어 제작한 지도로 외국의 국립공원을 돌아 본 경험을 살려 디자인서부터 사진, 해설 등에 이르기 까지 필자와 협의해가며 제작한 지도이다.

 지도의 축척은 1:60,000으로 설악산국립공원 경계를 전부 수용했으며 국립공원내의 자연보존지구, 자연환경지구, 공원보호구역, 집단시설지구,

 취락지구와 공원관리사무소, 분소, 매표소, 휴식처 심지어 공중화장실까지 표시했으며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조사한 코스타임과 자연휴식년제 구간

 까지 표시하였다. 지도의 표현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등고선 위에 음영을 나타내는 힐 쉐이딩만 넣어 정보의 식별을 용이하게 하였다.

 뒷면 하단에는 설악동집단시설지구의 확대도와 숙박업소 안내를 넣어 탐방객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며, 외국 탐방객들을 위해 영문과 한자를 표기한

 영문판 지도를 별도로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정유희 소장이 물러 난 이후 설악산관리사무소 노동조합에서 인수하여 최근까지 설악산 매표소에서

 일반에게 판매하였다.


 <지도29>설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제작한 설악산 국립공원 지도의 표지.


 최근의 설악산 지도

 위에 소개한 대로 제작공정은 복잡했으나 스크라이브 기법은 지도제작의 혁신을 가져 왔다. 그러나 1990년 초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미국 애플사의

 매킨토시 컴퓨터가 일반에 보급되고 상용화 되면서 지도 제작은 스크라이브에서 컴퓨터로 바뀌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생산하던 스크라이브 베이스의 생산도 중단되었고, 지도 제작에 쓰였던 라이트 테이블, 스크라이브 세트, 밀착기, 자동현상기

 등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소위 ‘맥’작업으로 가장 먼저 제작된 설악산 지도는 1996년 이재권 씨가 ‘월간 산’ 부록으로 제작한 지도

 이다. 매킨토시는 디자인, 출판 등에 탁월한 성능을 지닌 컴퓨터로 지도는 디자인 소프트웨어인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하여 제작하는데 도구와 방

식이 달라 졌을 뿐 지도 제작의 공정은 스크라이브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스크라이브 제도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도 6개월에서 1년 동안 수련을 거쳐야만 제도가 가능하지만 컴퓨터는 손재주가 없어도 누구나 컴퓨터를 다

룰 수 있으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그렇다고 지도 제작의 이론과 지식을 모르고 지도를 그린다면 지도의 품질은 저하될 것이고, 지도 제작의 수준

또한 퇴보할 것이 자명하다. 더구나 최근에는 국토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이 국가 기본도를 전산화하여 축척 1:5,000서부터 1:25,000, 1:50,000

지형도의 수치지도가 완성되어 배포되고 있어 민간에서는 지도를 그리지 않고 수치지도를 사용하여 손쉽게 지도를 제작하고 있기 때문에 손 맛 나

는 질 좋은 지도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2003년 말 ‘고산자의 후예들’에서 펴낸 「아름다운 우리 강산 설악산」지도는 컴퓨터로 제작된 입체영상 지도로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듯 보는 이

의 눈을 즐겁게 하는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92cm, 세로 53cm이고 설악산 남쪽 35° 각도 상공에서 내려다 보는 조감도 형식의

지도로 좌우(가로)의 길이는 실지와 같으나 상하(세로)의 길이는 사각이라 실지 길이와 다르다. 따라서 지도의 축척도 좌우 길이로 따져 1:39,000정

도가 된다.

첨단 3D 디지털영상기술을 보유한 ‘조우니테크’와 협력하여 국토지리정보원의 1:25,000 수치 지형도를 기본 데이터로 3차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

여 실시간 시뮬레이션 시스템에 의해 지형을 작성하고, 그 위에 등산로와 지명을 프로팅하여 제작된 이 지도는 컴퓨터만이 가능한 설악산 지도의 백

미라 할 수 있다. 현재는 대형 브로마이드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나 휴대하기 간편한 접지 지도도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도31>3D입체영상 기술로 제작한 설악산 입체영상 지도.


고찰한 바와 같이 설악산에 대한 안내지도는 1960년대부터 그려지기 시작하는데 그 변천과정은 시대의 상황과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발전상과 무관

하지 않으며, 등산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 초 손경석 씨를 시작으로 고 이우형 씨, 필자, 이재권 씨로 이어지는

산악지도 제작의 계보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참고 문헌>韓國의 古地圖 ; 李燦  汎友社  1966韓國의 옛 地圖 ; 영남대박물관  1988雪岳山探勝引導誌 ; 한찬석  설악산개발주식회사  1960登山百科

 ; 孫慶錫  문화당  1962登山의 理論과 實際 ; 孫慶錫 成文閣 1970登山手帖 ; 산수회  1967월간 「등산」 ; 山岳文化社  1969登山코오스案內集 ; 崔宣雄  

交進社  1971登山하이킹씨리즈③雪嶽山 ; 孫慶錫  成文閣  1971’72 alpine diary : 交進社  1971山으로 가는 길 ; 李祐炯 / 安京濩  匡祐堂  1984전국유명

100산 등산안내지도 ; 崔宣雄  成地文化社  1990大東輿地圖의 讀圖 ; 李祐炯  匡祐堂  1990천의 자태, 설악산 ; 최낙민 차림  1993국립공원 설악산 ;

 박그림  평화출판사  1995地圖學用語辭典 ; 日本國際地圖學會  1985地圖をつくる ; 岡田喜雄  新人物往來社  1978近世繪圖と測量術 ; 川村博忠  古今

書院  1992韓國地圖의 歷史 ; 方東仁  신구문화사 2001출처: 2004년 <山書> 제15호 게재
 

[PEOPLE] 대한지도협회 초대회장에 추대된 최선웅 씨
 
“과다한 심사청구비에 공동대처,지리정보 보급에도 앞장설 터”
대한지도협회가 창립됐다. 초대회장은 월간山에 ‘최선웅의 지도이야기’란 칼럼을 쓰고 있는 ㈜매핑코리아 최선웅 대표(한국산악회 부회장)가 맡았다.

국내 주요 지도제작업체들은 지난 4월17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발기모임을 갖고 “최근 급격하게 보급되고 있는 차량항법장치, 모바일기기,

인터넷지도 등과 같이 전자지도의 초강세로 인한 인쇄지도시장의 붕괴 조짐에도 국토지리정보원은 과다한 심사청구비로 존립 기반을 어렵게 만들고

있어, 이에 공동 대처키로 함과 동시에 국토지리정보 보급활동에 적극 앞장서겠다”고 결의했다.18개 업체가 지도협회 창립에 동의했으며, 이 날 모임

에는 최선웅 회장을 비롯, 전남식 한국인프라 이사, 함영식 성지문화사 상무, 이두희 시공사 상무, 이재곤 고산자의 후예들 대표, 신강금 영진문화사

전무, 이성구 중앙Books 총편집인, 안동림 동아지도 대표, 김은영 비틀맵 대표, 노권동 이너큐브 이사, 김인규 한백지리정보 대표, 김영옥 한백지리

정보 실장, 김영진 자티전자 이사 등 13개 업체 대표가 참석했다.

이들은 지난해 9월14일 국토지리정보원으로부터 ‘지도간행 심사신청 촉구’ 내용증명을 받은 8개 업체를 포함, 10여개 업체가 대책회의를 갖고 지도

협회를 창립키로 뜻을 모았다.

발단은 결국 지도간행물 심사청구비가 과다하게 부과된다는 데서 비롯됐다. 1:50,000 지형도를 이용하여 축척 1:85,000 전국도로지도를 제작할 경우

심사료 등 1,500여만 원이 든다. 1:25,000 수치지도로 1:85,000 전국도로지도를 제작할 경우 1억2천만 원 가량을 국토지리정보원 산하 대한측량협회

에 내야 한다. 전자지도 보급으로 지도출판물은 소비자들이 잘 사지도 않은 상황인데, 이만한 심사료를 내면 업체들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90년대에 연 3만부 가량 팔리던 모출판사 도로지도는 2000년대 들어 8,000부 가량으로 줄었다. 연 3만부면 지도출판물로는 단연 베스트셀러

에 속한다. 지도 선진국인 일본에서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영국에서도 최소사용료 8만원에서부터 인쇄하는 수량에 따라 저작권 사용료만 지불

하면 된다. 우리같이 터무니없는 심사료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12일 국토지리정보원장과 면담을 갖고 지도사용료의 현실화와

국토지리정보 보급발전을 저해하는 지도심사제도 폐지를 건의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얻지 못하고 있다. 협회는 이와는 별

개로 회원 확보와 권익보호, 체계적인 지도학 정립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한국 최초로 창립된 지도협회 초대회장을 맡은 최선웅 매핑코리아 대표는 “정부기관과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건의할 것은 건의해서 지도출판시장의

축소로 영세해지는 업체들이 돌파구를 마련할 대책을 찾겠다”며 “나아가 지도학의 정립 등 한국 지도업계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해외 관련단체와

교류를 확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지도전문 사이트를 만들어 지도정보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최 회장은 개인적으로는

40여 년 동안 쌓아온 지도와 관련된 경험, 지식, 정보를 총망라해서 연말까지 일반인이 지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재미있고 쉽게 풀어 쓴 ‘지도

란 이런 것이다’를 발간할 계획이다. 〈遠〉

▣ 한국지리와 신문>자연환경>(지형) 최선웅의 지도이야기/산의 높이
 
단 몇 미터 차이로 서열이 정해지고 이해가 엇갈린다 모산봉을 1m 높이는 데 시민의 동참을 바랍니다”라는 구호 아래 온 동네 사람들이 흙을 운반해 산을 3자3치 높이는 재미있는 사건이 지난 6월16일 강릉에서 있었다.

강릉시 강남동 칠사당 남쪽에 위치한 104m의 모산봉(母山峰)은 강릉의 안산으로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밥봉’이라고도 하고,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하여 ‘문필봉’이라고도 불렸는데,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로 부임한 한급(韓汲)이라는 자가 강릉에서 큰 인물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 해 이 봉우리를 3자3치 깎아 내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때 깎인 3자3치를 복원하기 위해 강릉 사람들이 나선 것이다.

1995년 영국에서 제작된 ‘잉글리시맨’(원제 The Englishman Who Went Up a Hill but Came Down a Monutain)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전설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 무대는 1917년 웨일스 지방의 변두리 마을. 영국인 측량사 두 사람이 피넌가루라는 산의 높이를 측량해 지도에 표기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는다. 이들이 측량한 산의 높이가 1,000피트(약 305m)에서 20피트가 모자라 측량법이 정하는 산의 높이에 해당되지 않자 ‘언덕’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오래 전부터 ‘피넌가루’를 자랑으로 여겨온 마을 사람들은 ‘산’을 지키려고 흙을 퍼올리고, 측량사들의 귀환을 저지하느라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산의 높이가 이해관계로 얽혀 큰 이슈가 됐다는 얘기다. 넓은 의미로 높이라는 것은 나무의 높이, 빌딩의 높이, 산의 높이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그 기준은 각기 다르다. 나무나 빌딩의 높이는 지면으로부터의 높이로 비고(比高)라 하고, 산의 높이는 해면으로부터 잰 높이라 하여 해발고도(海拔高度), 또는 표고(標高)라 하고, 비고에 반해 진고(眞高)라고 한다. 그러나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있고, 파도나 해류 등에 의해 해수면이 일정치 않아 육지의 정확한 높이를 재기 위해서는 평균해면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닷가에 조수간만의 차를 측정할 수 있는 험조장(驗潮場)을 설치하여 오랜 기간동안 검조기록을 토대로 평균해면을 얻어낸다. 엄밀히 말하면 평균해면은 바닷물이 들고나는 바닷가이기 때문에 육상에 정확한 고정점을 설치해야 된다. 이렇게 육상에 설치된 평균해면의 고정점을 수준원점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수준원점은 1963년에 인천시 남구 용현동 인하대 캠퍼스 내에 설치됐고, 그 높이는 26.6871m다. 이 수준원점을 기준으로 국도변이나 관공서, 학교 등지에 2~4km 간격으로 5,251개의 수준점을 전 국토에 설치해 높이를 측정하는 수준측량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지형도 상에서 산의 높이를 알 수 있는 것으로는 삼각점과 표고점, 그리고 등고선이 있다. 삼각점은 원래 위치의 기준이 되는 기준점으로, 측량을 위해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산이나 구릉지대의 삼각점은 대부분 산정부에 설치되어 있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 산정부라 하더라도 그곳이 반드시 가장 높은 곳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산의 높이를 놓고 종종 시시비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지역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곳에 표시된 표고점도 해발고도인데, 지형도에서 보면 산봉우리가 있는 곳에 등고선 색깔과 동일한 색으로 표시된 표고점과 표고수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지도를 들고 산행하다 보면 표고나 산이름이 없는 봉우리를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봉우리들을 흔히 무명봉이라 하는데, 이 봉우리의 높이를 알려면 등고선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봉우리가 있는 마지막 등고선의 높이와 그 다음 가상의 등고선과의 중간 높이를 잡으면 된다. 축척 1:25,000 지형도의 등고선 간격은 10m이기 때문에 봉우리의 마지막 등고선이 1210m인 경우 봉우리의 높이를 1215m로 추정한다는 뜻이다. 이 경우 몇m의 오차는 감안할 수밖에 없다.최근 가야산이 산높이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가야산의 주봉은 상왕봉(象王峰)으로 삼각점 표석이 있는 높이는 1,430m였다. 그러나 상왕봉 서남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솟아 있는 바위봉인 칠불봉이 주봉인 상왕봉 보다 3m 높다는 것이 문제다. 현재 상왕봉에는 합천군이 세운 정상표석이 있고, 칠불봉에는 성주군이 세운 정상표석이 있어 저마다 가야산 정상임을 내세우고 있다.

성주군의 요청으로 2004년 2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GPS측량기로 실측한 결과 상왕봉이 1,429.8m, 칠불봉이 1,432.8m로 의외의 결과가 나와 논란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 높이는 공표된 것은 아니지만 칠불봉이 상왕보다 2.6m 더 높고, 가야산의 높이가 2.8m 높아진 결과가 됐다. 지도를 보면 가야산의 주능선은 경북과 경남의 도경계를 이루며 성주군과 합천군이 가야산을 공유하고 있다.

행정경계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선이기 때문에 주능선의 산마루를 따라 경계가 그어졌다면 상왕봉과 칠불봉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인공위성측량이라는 최첨단 정밀 GPS측량기를 이용해 측정한 산의 높이가 몇m씩 차이가 난다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삼각점 높이가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삼각점의 높이를 측정할 때는 트랜싯에 의해 경사거리와 연직각으로부터 수평거리나 고저차를 측정하기 때문에 삼각점은 위치는 정확하지만, 높이는 수준점에 비해 정확도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산의 높이는 빛의 굴절 등 측량기계에 의한 오차, 온도나 습도 등 기상변화에 의한 자연적인 오차, 측량하는 사람의 부주의나 미숙에 따른 인위적인 오차, 동일한 조건하에서 측정해도 발생하는 우연적인 오차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정확한 높이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 몇 미터로 서열이 정해지고, 단 몇 미터로 이해가 엇갈리는 산의 높이는 이제 정확하게 재어 놓을 필요가 있다. 산은 그 높이로 존재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출처: 월간 산 2005년 8월 4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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